2026년도 대구아트웨이 입주예술인 릴레이 개인전 <월간범어> 2회자 황주승 "eden"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황주승 작가론
황주승 작가는 3D 프린팅 기법으로 조소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특이하게도 그의 작업은 열풍으로 하나 뿐인 독특한 형태를 만들어 복제가 가능한 다른 3D 프린팅 작품과 달리 각각의 작품이 갖는 ‘유일성’이 강조된다. 복제 가능한 기술로 비복제성을 이루려는 역설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완벽한 복제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기술인 3D 프린팅 기법을 사용하지만 열풍으로 각기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일종의 디지털 시대의 예술의 아우라 회복을 위한 시도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라는 다소 종교적인 제목으로 각각 흰색과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식물의 형상을 설치 작품으로 만들어 선보인다. 복제나 차용이 현대미술의 자연스러운 언어가 된 시점에서 그가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미국의 설치 미술가 마이크 켈리(Mike Kelly)의 작품처럼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분위기의 키치에 가까운 작품을 주로 만들기도 하는데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들의 여러 부분을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만든 듯한 조각 작품에 ‘특별시민’과 같이 특정 집단 속 개개인의 개성을 부각시키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그의 신작 또한 ‘에덴 동산’이라는 태초의 이상적 공간을 상정한 것이며 그곳으로부터 인간이 떨어져나오게 된 계기인 선악과나 생명나무 등을 모티브로 한다. 오히려 주관성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표식을 적절히 채택, 작품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현대미술. 독창성, 천재 혹은 광인의 개념이 와해된 예술 현상의 원인 중 하나가 기술의 발달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글 ‘기술적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에서 기계 복제가 예술의 아우라를 약화시킨다고 했는데 황주승 작가는 이러한 복제 기술 안에서 다시 아우라를 만들고자 하는 동경을 작품에 드러낸다. 완전히 설계된 형태를 출력하는 3D 프린팅 기법을 사용하지만 열풍으로 형태를 변형시키며 아날로그 방식을 개입시키는 것인데 계획된 형태에 우연적 효과를 겹쳐 놓음으로써 복제 기술을 사용하지만 결과적으로 단 하나의 조형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개입의 시점은 현대 조각에서 자주 논의되는 문제인데 그의 작품에서도 그 주관성의 여부가 모델링 단계를 거쳐 출력 이후의 물리적 변형 과정에서 확장된다.
그의 기술은 성서적 상징과 맞물려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가 작품의 제목으로 상정한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당연히 성경 속 창세기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마치 선과 악, 빛과 어두움 등의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함께 이야기하려는 듯 흰색의 생명나무, 검은색의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다.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한 그의 창조 행위는 일종의 현대적 창세기의 은유이며 차용 예술의 시대의 원본성에 대해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생명, 구원, 빛에 관한 은유인 흰색의 생명나무와 지식, 타락, 금기 등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색의 선악과는 차용과 복제가 당연해진 현대미술, 이제는 인공지능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제안마저 나오고 있는 시대에 대해 우리 모두가 무의식 중에 갖는 불안과 우려에 관한 목소리일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차용과 복제는 매우 흔하다. 대표적인 차용 예술(Appropriation art) 작가 쉐리 레빈(Sherrie Levine)은 사진작가인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사진을 그대로 다시 찍어 ‘After Walker Evans’ 라는 제목으로 작품화했으며 제프 쿤스(Jeff Koons)는 모든 미국인들이 좋아할만한 고전적이거나 상업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원본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황주승 작가는 복제가 너무도 당연한 3D 프린팅 기법을 사용하며 ‘디지털 시대에도 작품의 유일성은 중요한가?’, ‘기술로 만든 작품도 단 한번의 사건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한번 제기하며 기술과 유일한 조형성 사이에서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제목을 붙인 것, ‘에덴 동산’이라는 태초의 이상적인 공간을 상정한 근거가 자리하며 많은 부분 창조자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동경을 내포한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다룬 조각은 미국의 조각가 폴 매카시(Paul McCarthy)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만들어 왔다. 일종의 왜곡된 창조자 역할을 하는 폴 매카시는 플라스틱, 실리콘, 인형과 같은 저급한 재료와 키치적 이미지를 사용해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타락을 희극적, 혹은 비극적으로 드러내어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작가가 ‘창조자’라는 메타적 자의식은 설치 미술가 마이크 켈리(Mike Kelly)에게서도 두드러지게 보여지는데 이는 현대미술에서 종종 나타나며 작가가 자신이 만든 존재(작품)에 대한 책임이나 연민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마이크 켈리는 봉제 인형, 장난감, 싸구려 오브제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순수함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낡고 더러운 장난감에 투사시키며 상처 입은 인간, 불완전한 한계를 지닌 안타까운 인간에 대한 연민을 담아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존재들을 만들어낸 사람처럼 그들을 다시 배열하고 보호한다. 따라서 관객은 기괴함과 동시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황주승 작가가 특유의 캐릭터 작업에서 성서적 상징물로 이동한 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탐구의 일환일 것이다. 단순한 소재의 변화가 아니라 첨단 기술을 누리면서도 위협 받는 AI 시대의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더욱 메타적으로 인식해야할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그가 창조해낸 모든 것들의 기원을 묻는 성서적 상징으로서의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단순한 종교적 이미지가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자의식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완벽한 복제를 불허하고자 한다는 그가 작품의 제목으로 선택한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이미 인간이 비록 신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연약하고 우스꽝스러운, 선악의 분별이나 악의 유혹 속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들풀에 지나지 않고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거스르거나 간과하지 않으며 그 속에 품는다.
흰색의 생명나무와 천사, 검은색의 선악과와 가면 거울 등은 색을 흑백으로 제한한 탓에 이전의 캐릭터 작업에 비하면 어딘가 처연하고 의미심장해 보여서 세기말적인 불안을 느끼게도 한다. 형태는 튼튼한 나무보다 꽃에 가깝고 흰 꽃과 검은 꽃 수술 부분에 조명을 달아 빛을 내고 있지만 어딘가 시들어가는 꽃잎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인상은 그가 쓴 최신의 기술과는 달리 완전히 새로운 외형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중요한 미술사적 계보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그의 꽃은 종종 검은 꽃, 기괴한 식물, 꿈과 같은 식물 형상을 주로 그리며 19세기 말 상징주의 전통을 보여 준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Odion Redon)을 떠올리게 한다. 오딜롱 르동의 꽃은 실제의 식물이기보다 정신, 영혼의 은유에 가까우며 생명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죽음과 쇠락의 상징이었다. 그의 꽃이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자연의 신비에 관한 것이었고 그의 생에에 걸친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태초의 공간과 질서를 암시하고자 하는 황주승 작가의 꽃과 좋은 비교가 될 듯하다. 또한 그의 꽃은 강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등을 강조한 17세기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의 전통 역시 떠올리게 하는데 바니타스 화가들이 성경 속 구절을 몸소 살고 실천하며 화폭에 담았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바니타스는 인간의 삶의 덧없음과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세속적 영광의 허무 등을 상징하는데 코헬렛서와 이사야서에는 이를 이야기하는 구절이 각각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서 1:2)”,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이사야서 40:6~8)” 라고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아름다움, 영광, 성취는 풀과 꽃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니 인간의 운명을 깨닫고 신 앞에 겸손할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이다. 생명의 끝을 상징하는 여러 기물, 꺼져가는 촛불이나 모래시계, 썩어가는 과일이나 곤충 등이 극명한 대비로 묘사된 그림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지나갈 뿐이니 영원한 빛을 추구하고 그 속에 머물 것을 강조한다. 빛의 방향을 분명히 읽을 수 있도록 사선의 구도를 써서 빛을 표현한 바니타스화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종교적 교훈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적 바니타스로도 해석할 수 있는 황주승 작가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생명과 죽음 등의 이원론적인 요소를 함께 갖고 있는 인간. 금지된 열매를 먹고 신과 분리된 인간이지만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말한 것처럼 몸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몸이라는 껍데기를 입었다는 것, 그렇게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신과 온 우주와 대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플라스틱으로 된 에덴동산이든 복제를 불허하는 보다 최신의 기술이든, 전쟁과 재해가 난무하여 기아와 난민이 속출하게 하는 고약한 신이어도 쓰러지는 들풀임을 알고 그 앞에 겸손할 것을 담아내는 하나의 그릇일 것이다.
황주승 작가의 에덴 동산은 이제 인간을 흉보기 시작했다는 AI 시대에 우리가 갖는 불안과 두려움, 선과 악의 분별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여전히 우리는 신이 주신 자유의지로 희망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기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까? 이미 도래한 듯한 느낌이 드는 시점에서 마치 서열정리라도 하듯 작가는 하나하나가 신의 작품인 우리 개개인의 인권에 대해 외치고 있는 듯하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화가, 미술번역가, 평론가 김윤경
eden 꽃 만들기
개인마다 다른 모양으로 완성되는 플라스틱 꽃 한송이를 만들어봅니다
운영일정: 4. 10.(금), 4. 24.(금) 14:00
소요시간: 60분
대상: 전연령
인원: 최대 10명
재료비: 5,000원(현장 지급)
신청방식: 작가 인스타그램 계정(@831_stand_house) 또는 현장 접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