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곽명희 개인전 <Le Vide_존재하지 않는 세계>
전시기간 : 2023년 10월 4일(수) ~ 11월 4일(토)
전시장소 : 대구아트웨이 스페이스1 전시실
올해 3기를 맞은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청년키움프로젝트 <개인전>은 지역의 유망한 청년 예술가의 창의적, 도전적 예술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자 2021년에 처음 기획되었습니다. 지난 3월 공모를 통해 총 6명의 청년 예술가가 선정되었으며, 선정 작가에게는 ‘생애 최초 개인전’을 개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네번째 전시로 곽명희 작가가 참여합니다.
무의식 시리즈는 홀로 조용한 공간에 누워서 의식의 흐름대로 상상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으로, 문학이나 영화 속 인물의 내면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근거로 하여 추상적인 세계를 평면 회화로 그린 작업이다.
꿈에서 본 시각적인 장면과 개인적인 경험인 청각을 조합시켜서 여러 가지의 악몽을 제작하였는데, 작가 본인의 감정 파편들이 관람하는 이의 머릿속에 일방적으로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 한계를 깨닫고, 내면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관람자가 몰입할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 방식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공간을 구현하는 설치 작업은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2d rpg게임, 즉 쯔꾸르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쯔꾸르: 만들다'라는 뜻의 일본어つくる와 tool의 일본식 표기인 ツール이 합성된 조어)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현실에서 구축해 나갈 방식으로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챕터를 클리어하고 나아가는 모습에서 착안하였다. 왜냐하면 게임과 인생의 메커니즘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지고, 선택과 결과는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고, 어떤 종류의 엔딩을 맞이할지는 플레이어(본인)조차 알 수 없다.
그렇게 미지에서 발생하는 불안함과 호기심의 감정이 발생하면서, 삶에서 이뤄지는 선택과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입체적인 이야기를 형성하게 되고,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다양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는 특정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Le Vide는 미성숙했던 시기, 꿈속에서 상상했던 세계를 게임의 형식을 빌려서 머릿속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한 전시이다. 전시를 들어서면서 관람자는 게임 속에 접속하게 되고, 경계심을 푸는 순간 스토리가 흘러나오며, 챕터가 진행된다. 현실이 아님을 자각하면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게이트가 열린다.
무대와 세계 사이에서: 곽명희 개인전 서문
안준형(시각예술비평가)
1. 지금 무대엔 어떤 사건이 올라가 있는 걸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
달콤한 이야기와 쓴 이야기 중에서 우선은 쓴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곽명희 작가의 전시를 보고서, 특히나 가장 큰 크기의 작업인 <Ending> (장지에 채색, 가변크기, 2023)을 보고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무대미술 아니야?’ 기실 무대미술(적)이라 함은 주로 화이트 큐브에서 전시가 이루어지는 미술의 현장에서 그다지 우호적인 감상이 아니다. 차라리 우려의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여긴 일단 무대가 아닌 전시장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같은 표현이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소위 일기장 작업이라는 표현이 가장 널리 애용되는데, 이는 그저 흥미롭지 않은 작업들에 대한 가벼운 표현의 레토릭으로 사용될 뿐이다. 하지만 이같은 표현이 이번의 전시에서만큼은 한 번 긍정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유는 그의 작업이 진지하게 무대를 전면화하는 시도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곽명희 작가가 이 전시에서 만들고 있는 공간을 일종의 무대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 도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다시 말해, ‘지금 무대엔 어떤 사건이 올라가 있는 거지?’
하나의 진술을 떠올려 보자. ‘연못이 일렁이고 있다.’ 이같은 진술이 다름 아니라 지금 이곳과 같이 미술 전시 안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이 또한 마찬가지로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처럼 멋진 에티켓을 가진 미술 전시의 관람객이라면, 그는 우선 기꺼이 그 풍경을 ‘유심히 바라볼 것’이다. 실은 보는 것 이외의 행위가 당신에게 허락되어 있지도 않다. 당신은 연못의 풍경에 ‘손을 담가본다’거나 즉, 전시 중인 작품을 만질 수도 없고, 이 풍경의 일부가 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은 이 무대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사실 미술 전시를 관람하는 일은 꽤나 수동적인 행위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좀 지루한 일이기도 하다. 최소한 당신이 갖고 있을 스마트폰을 능동적으로 두드리는 행위보다는 훨씬 지루한 일임이 분명하다. 물론 지루하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당신은 미술 전시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대충은 알고 있다. 그래서 전시장의 중앙 벽에 걸려 있는 액자 하나는 당신을 조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한 뼘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작은 크기의 액자에는 영문을 알기 어려운 짧은 문장과 지문이 적힌 종이가 들어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연못이 일렁이고 있다.’ 대체 이곳 어디에 연못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보다 더 의아한 것은, 마치 이 진술에 대해 어떤 반응을 요구하듯, 선택지로서의 대답들이 적혀있다는 점이다. ▷유심히 바라본다. ▶손을 담가본다. ▶그만둔다. 그리고 여기에 적혀있는 것처럼, 당신이 일렁이는 연못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최소한 연루되어 있는 셈이다. 당신은 그저 수동적으로 보기만을 위해서 이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질문해 보자. 지금 무대엔 어떤 사건이 올라가 있는 걸까?
2. 레퍼런스로서의 게임적 경험
누군가는 이처럼 보는 이에게 선택지를 주는 특정한 인터페이스의 모습이 아주 익숙할 것이다. 이는 디지털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텍스트 기반의 상호작용 시스템이 취하는 전형적 모습이다. 곽명희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게임, 특히나 ‘쯔꾸르 게임’으로부터 많은 레퍼런스를 얻었다고 밝힌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전시는 아마도 작가가 직접 플레이하면서 경험했을 쯔꾸르 게임에 대한 나름의 비평적, 조형적 대응이 중요한 바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쯔꾸르 게임이란, ‘RPG Maker’로 대표되는 특정한 게임 제작 툴로 만들어진 게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때문에 쯔꾸르 게임으로 지칭되는 게임의 장르적 범주는 다소 정의하기 까다롭지만, 흔히 쯔꾸르 게임이라고 하면 탑뷰 혹은 쿼터뷰 시점의 2D 픽셀 그래픽을 가진 고전 RPG 스타일의 게임들을 떠올린다. 예컨대 실제와 같은 그래픽을 가진 요즘의 게임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게임들의 느슨한 모임이 쯔꾸르 게임인 것이다.
많고 많은 게임들 중에서 특별히 쯔꾸르 게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독특하다면 독특한 일이다. 흔히 시각적인 차원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게임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다면, 그 관심은 우선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CGI)에 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는 디지털 게임의 가장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진 영역이기도 하고, 우리는 신작 게임이 발매했을 때 우선 그래픽 이미지의 경이에 가장 먼저 반응하기도 한다. 반면, 곽명희 작가가 참조하는 쯔꾸르 게임의 고전적인 그래픽 스타일은, 미안한 말이지만 멋진 그래픽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가 시각적 재현의 차원에서 게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다. 그가 그림에서 그려내고 있는 공간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란 말인가? 그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걸까?
3. 세계 그리기
<想像의 세계>(장지에 채색, 112x450cm)와 <Ending>(장지에 채색, 가변크기)은 이 전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이 작품들이 그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두 그림들은 공통적으로 무채색의 패턴화되지 않은 얼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백한 물고기의 형상과 바위처럼 보이는 몇 개의 묘사를 제외하면 이 그림 속의 대상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어떤 공간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곽명희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그리는 것은 ‘어떤 경험에 대한 즉흥적인 그리기’라고, 아마도 그 경험 중의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던 게임에 대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니 이를 정리해서 다시 말하자면, 그는 특정한 게임적 경험에 대한 즉흥적인 그리기를 시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소 비판적으로 재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즉흥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이지 어려운 행위라는 점에 있다. 흔히 즉흥적 행위라고 하면, 뭔가 고도로 이성적인 행위와는 대비되면서, 빼곡한 의미로 가득 차 있는 후자 즉, 어렵고 머리 아픈 행위와는 달리 되게 감각적이고 산뜻한 행위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일 공산이 크다. 적절히 훈련되지 않은 ‘즉흥’은 그 자체로 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낙서가 되기 마련이고, 이를 보는 일 역시나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 찬 철학책을 읽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하여, 나는 그의 작업을 그 스스로가 말한 즉흥적 차원이 아니라, 나름의 내적 논리를 가진 조형적 시도로 이해하고 싶다.
다시 그의 그림 속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의 그림은 어떤 공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 공간은 아마도,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계’일 것이다. 그가 작업의 레퍼런스로 삼는 게임적 경험은 어떤 저쪽의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 추상화된다. 작가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경험을 조형하기 위해서 무대라는 공간을 간접적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 무대를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대를 전면화하기 위해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작업은 세계와 무대 사이에 있다. 한 작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열쇠를 얻었다.’ 물론 열쇠는 닫혀 있는 공간을 열기 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닫힌 공간 자체에 대한 단서가 된다. 열쇠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이를 통해 열 수 있는 공간 또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전적으로 그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